여의도 순복음교회와 관련된 논문을 준비하던 중, 한국의 최초 대형교회는 여의도 순복음교회라 할 수 있지만, 그보다 앞서 박태선의 전도관 운동이었다는 신문기사를 보았다. 미국에 있는 이계선 목사라는 사람이 쓴 "대형교회가 망해야 한국교회가 산다"는 글의 일부분이었다.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현대 기독교가 처한 양날의 칼중 하나가 대형교회(mega church)라는 생각은 일찍부터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형교회의 문제점을 비판하였다는,,,저자의 생각인지 출판사의 농간인지는 모르겠으나 '파문을 각오하고 쓴 한국판 95개조 항의문'이라는 책을 소개하는 글은 한번쯤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 실망스럽다.
책은 총 5장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각 장에는 곳곳마다 한국의 일부 대형교회 및 목사에 대한 저자의 원색적인 비난이 실려있을뿐이며, 대형교회에 대한 저자의 지적은 3장에 주로 치우치고 있는데, 대형교회에 대한 분석이나 대안이 수준에 못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대형교회에 대한 비판은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대형교회로 인해 소형교회가 줄어들었으며,
2. 대형교회의 목사 생활에 매료된 젊은이들이 신학의 길로 들어서다 보니 신학교와 목사가 과잉 양산이 된 점,
3. 대형교회는 교회 부패의 온상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각각의 비판점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형교회로 인해 소형교회가 줄어든다는 것은 잘못된 인과관계에 기초한 추론이다. 대형마트가 있기 때문에 작은 가게들이 망하게 된다는 것과 일견 비슷한 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 둘을 단순히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대형교회가 대형마트처럼 각 지역으로 위성교회를 확대할 경우에는 저자의 주장은 설득력을 지닐 수도 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온누리교회와 같은 대형교회들은 각 지역의 위성교회(지역성전 혹은 비전교회)를 설립하면서 그 영역을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대형교회가 지닌 일반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점으로 볼 수는 없다. 종교시장의 개념으로 접근한다면, 여러 교회 들과의 경쟁(?)을 뚫고 대형교회화되는 현상에 주목하여 이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고, 그것이 가져오는 문제점을 통해 왜 소형교회가 사라지는가에 대한 문제를 설명해야지, 단순히 대형교회가 있기 때문에 소형교회가 줄어든다는 것은 설득력을 확보할 수 없다.
대형교회의 목사생활에 매료된 젊은이들이 신학교를 간다는 저자의 주장은 작은 것을 전체로 설명하는 오류에 불과하다. 신학교에 가는 학생중에 소명보다 돈과 지위, 안정적 생활을 꿈꾸며 가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정말로 저자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하다못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통계자료라도 제시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저자의 생각은 소설에 불과하다.
대형교회는 부패의 온상이 될 수 있다. 규모가 큰 조직에서 문제점이 작은 조직보다 더 많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그렇다면, 소규모 교회는 부패가 없는가? 교회의 부패 원인은 대형과 소형에서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운영하는 조직체계와 교회의 리더자인 목사와 장로들의 도덕성과 인격에서 비롯된 문제이다. 저자는 짐 베이커, 로버트 슐러 등을 예로 들며 대형교회가 부패의 온상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자 하였으나, 이 역시 일부분의 사례로 전체를 설명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불과하다.
한편, 저자는 한국의 대형교회가 이단으로부터 기인하고 있으며, 세습, 성경공부, 헌금, 전도 등 이단적인 요소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문제라고 지적한다. 교회 목사라는 신분에서 이런 시각은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객관화하기 위해서 "종교학에서는 교회의 건전성을 정통 > 이단 > 사이비 > 사교로 분류한다"는 정집사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정집사나 저자는 종교학과 신학의 차이점을 전혀 모르고 있다. 위의 구분은 신학적 입장에 기초한 것으로 종교학에서는 특정 종교에 대한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종교라는 현상을 객관적이고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통과 이단의 잣대를 제시하지 않는다. 정통과 이단은 해당 종교의 교리 내부에서 나타나는 구분의 문제일 뿐, 외부 관찰자의 시점에서 정통과 이단의 구분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대형교회의 문제점을 이단에서 찾는다는 점에서부터 이미 저자의 대형교회에 대한 비판과 대안은 교회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저자는 대형교회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개교회주의에서 교단중심으로의 변화, 국가의 개입, 유기농적 변화(유기농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으나 순수성의 회복을 의미), 평신도에게 과도한 집회 참석, 성경공부 등의 금지 등을 제시한다. 그러나, 하나같이 이러한 주장들은 너무 추상적이거나 실현불가능하며, 잘못된 인과관계의 분석에서 비롯된 것이다.
종교의 순수성 회복을 주장하는 저자가 종교의 개혁을 위해서 국가의 개입을 요청하는 것은 종교의 순수성을 포기하자는 주장이다. 국가와 종교의 관계는 종교사회학에서의 오랜 화두 중의 하나로 그 적정한 선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많다. 그러한 논란에 대한 인식없이 무턱대고 종교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국가의 개입을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실현도 불가능한 문제이다.
평신도를 목사로 만들지 말고, 교인들을 일요일의 순교자로 만들지 말라는 주장이 대형교회에 대한 해법일까? 그것은 대형교회가 아닌 한국 개신교 일반에 대한 문제제기일 뿐이며, 저자의 주장이 실현된다 하더라도 대형교회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유일하게 첫번째 대안은 대형교회, 아니 개교회주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 교단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세력들이 대형교회의 목사들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교단 중심적 개혁이 실현가능하겠냐는 근본적인 문제가 대두된다. 결국, 가톨릭처럼 명확한 위계질서가 뿌리내려 있지 않는한 개교회주의로의 회복은 불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형교회의 문제점에 대한 인식과 해결은 종교 공동의 구성과 운영에서 출발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는 알지 못하는 익명의 다수가 모인 곳이 아니라 서로를 잘 알며 함께 기도하고 삶을 공유할 수 있는 소규모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목사의 설교나 교회의 분위기가 아닌 신앙 중심의 공동체가 올바로 형성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자연스레 교회는 대형에서 소형화로 변화될 수 밖에 없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와 관련하여 얼마전 사랑의 교회가 새로운 교회 건물을 건축한다는 기사는 한국의 대형교회가 지닌 한계와 문제점을 잘 보여준다. 1980년대 옥한흠 목사는 당시 800여명의 성도들이 출석하는 상황에서 2천여명이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현재의 사랑의 교회를 건축했었다. 한국의 대형교회중에서도 사랑의 교회가 주목받았던 이유는 옥한흠 목사의 제자훈련과 교회건축에 쏟을 힘을 다른 곳에 사용하겠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오정현 목사가 담임으로 있는 사랑의 교회는 현재 8만 여명의 교인으로 인해 일요일마다 예배드리는 데 많은 어려움과 인근 지역에도 많은 피해를 양산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새 건물을 짓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교회 건축의 필요성과 문제점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스스로 건물을 키워 대형화하기보다는 교회를 찢어서 소규모의 교회를 지향했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높은뜻숭의교회가 현재 예배드리는 곳에서 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장소를 찾기보다 다른 4곳의 장소를 찾아 교회를 분열한 것은 참신하면서도 바람직한 시도였었다. 그러한 아름다운 선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교회라는 형체를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건물을 짓는 사랑의 교회의 지도자들의 생각의 짧음이 아쉽다.